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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탄생과 사건 및 몰락까지

1476년 - 사림 등용 시작 (성종)

1. 성종 시대, 사림의 등장은 우연이 아닌 구조적 전환의 결과였다
조선 전기, 특히 성종 대는 조선 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 핵심은 바로 ‘사림(士林)’의 본격적인 등용이다. 성종이 즉위한 1469년부터 시작된 정치는 세조와 예종 시기의 강권 정치에서 점차 문치(文治)로의 전환을 꾀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조정은 훈구 세력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이들은 개국공신의 후예로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왕권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횡과 사리사욕 추구는 성종의 이상적인 유교 정치를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성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정의 도덕성과 학문적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새롭게 지방에서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인물들을 발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바로 향촌의 선비 계층, 곧 ‘사림’이었다. 사림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사회 정의와 정치 윤리를 중시하는 집단으로, 성종은 이들의 도덕성과 청렴함을 이용해 훈구 세력의 견제를 도모하였다. 특히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 출신 사림 인사들이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 언관직에 대거 등용되면서 본격적인 사림 정치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1476년 - 사림 등용 시작 (성종)

 

2. 사림 등용의 대표적 사례 –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
1476년은 사림 등용이 정책적으로 가속화된 결정적 시기로, 이 해를 전후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계 인물들이 대거 중앙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이미 지역에서 명망 높은 성리학자였으며, 그의 인품과 학문은 성종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성종은 그를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함으로써 정치 개혁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김종직은 중앙에서 관직을 맡는 동안에도 후학 양성에 힘썼고, 그의 문인들인 김굉필, 정여창, 남곤, 조광조 등은 훗날 조선 정치사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문관이 아니라 사상과 윤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엘리트 집단이었다. 특히 이들은 성리학에 입각한 군주론과 도덕 정치 이념을 강조하며, 훈구 세력의 현실 정치주의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김종직은 「조의제문」 같은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는데, 이는 후일 무오사화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러한 사림의 존재가 성종의 이상정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왕권과 도학 정치의 조화를 실험하는 시기였다고 평가된다.

 

 

3. 사림 등용이 가져온 조선 정치의 내적 변화
성종의 사림 등용은 단순히 인재 채용을 넘어 조선 정치 구조에 질적 변화를 불러왔다. 사림은 언론 기관인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권력 감시와 도덕성 확보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특히 이들은 ‘성리학적 유교 정치’ 실현을 위해 관직 수행은 물론, 제도 개혁, 법령 정비, 인사 평가 등 각종 국정 운영 전반에 깊이 관여하였다. 훈구파가 실리적이고 경험주의적 성향이 강했다면, 사림은 이상주의와 원칙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어 조정 내 이념적 긴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긴장은 정치적 갈등으로 번졌고, 사림은 점차 훈구의 견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갈등이 곧 조선 정치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사림은 지역과 학맥 중심의 인사 구조를 통해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새로운 정치 네트워크를 형성하였고, 이후 향약, 서원 등의 제도 정비에도 기여하였다. 결국 이들은 단순한 관료집단을 넘어 조선 사회 전반의 윤리 기준과 문화 형성에 기여한 핵심 엘리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4. 사림 정치의 씨앗을 뿌린 성종,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성종의 사림 등용은 후대 조선 정치의 양대 축인 ‘훈구 vs 사림’ 구도를 만들어낸 출발점이었다. 비록 성종 말기부터 사림과 훈구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며 사화가 연이어 발생했지만, 이는 사림이 단순히 이용당하는 세력이 아니라 조선 정치의 주체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하는 사건들이기도 하다. 사림은 성종 이후 중종, 선조 대를 거치며 집권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조광조의 개혁, 동인과 서인의 분화, 나아가 붕당 정치의 시작 등 조선 정치의 모든 흐름은 이때 시작된 사림 등용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종은 온건하고 학문을 존중하는 성품으로 정치적 균형을 꾀했으며, 그의 사림 등용은 그저 훈구 견제용 카드가 아닌, 조선 정치사상과 제도의 발전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사림의 등장은 조선 정치에 ‘윤리’와 ‘원칙’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었고, 이후 500년 조선 정치의 방향을 결정짓는 씨앗이 되었다. 성종은 그 씨앗을 뿌린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조선의 정치는 보다 유교적인, 보다 이상주의적인 궤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1476년 사림 등용은 단순한 관료 임명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결정적 사건이었다.